한단의 걸음걸이를 미처 터득하기 전에 옛 걸음걸이를 잊어버리고 말다
한단학보 미득국능 우실기고행의 (邯鄲學步 未得國能 又失其故行矣) -장자(莊子) 추수(秋水)편

이소영<br>문화로드 대표<br>교육학박사<br>
이소영
문화로드 대표
교육학박사

한 젊은이가 조나라의 한단 사람들에게 걷는 모습을 배우려고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자신의 걷는 습관 때문이라고 생각해 원래의 걷는 방법을 버리고 걸음마부터 다시 배우기로 하였다. 
하지만 끝내 한단 사람들의 걷는 법을 배울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원래 걷는 법마저도 잊어버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를 줄여서 ‘한단학보’라 하고 어설프게 남의 흉내를 내다가 주체성마저 잃어버림을 경계하는 의미로 쓰인다.
재미교포 이민진 작가의 소설 ‘파친코’를 읽었다. 1910년부터 1989년에 이르는 부산 영도에 살던 어부의 아들 훈, 훈과 양진의 딸 순자, 순자가 오사카로 건너가 낳은 아들 노아와 모자수, 모자수의 아들 솔로몬 등 4대에 걸친 이야기였다. 내용의 1/4 정도가 영도, 나머지는 일본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작가 이민진은 일본에 살던 때 만났던 재일교포들의 생생한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을 썼다고 한다. 
주인공 순자는 일제강점기에 장애를 가진 가난한 아버지의 딸이다. 그럼에도 주체적이고 당당하게 고난을 이겨나간다. 첫사랑 고한수가 유부남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임신한 상태에서도 바로 결별을 선언한다. 남편 이삭이 일왕참배를 거부하는 사건으로 경찰에 잡혀가 집안 살림이 어려워지자 일본말도 못하면서 김치를 만들어 길거리에서 판다. 그녀의 힘의 원천은 아버지 훈이 생전에 보여주었던 존중과 사랑에 대한 기억이다.   
순이의 아들 노아와 모자수는 자이니치(일본에 사는 외국인)라고 불리며 차별을 당한다. 공부를 잘하는 노아는 와세다 대학에 입학하고 모자수는 일찍 학교를 중태한 후 파친코에서 일하게 된다.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파친코는 부정적으로 인식되지만 한편으로 직장을 구할 수 없었던 일본에 살고 있는 조선인들에게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소설의 제목이 파친코인 이유도 조선인들에 대한 부정적 평가와 그들의 진솔한 삶의 이중적 의미가 담겨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와세다 대학을 다니던 노아는 늘 닮고 싶어 하던 책을 좋아하던 백이삭이 친 아버지가 아니고 자신이 야쿠자인 고한수의 아들이라는 걸 알게 된다. 노아는 학교를 자퇴하고 가족과의 연락도 끊고 사라진다. 나가노라는 지방으로 가서 반 노부오라고 이름을 바꾸고 파친코 일을 하며 일본여자와 결혼하고 아이들을 낳고 산다. 일본에서 나서 일본에서 자랐지만 일본인이 아닌 노아는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일본인처럼 살아간다.  
재일교포로 일본에서 살려면 무엇을 희생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하는 내용이었다. 순자에게는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울타리가 있었다면 노아에게 있던 순자의 사랑은 외면해야 하는 것이었다. 
한 나라의 일부가 되기 위해, 고통스러운 차별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단학보’를 선택했던 노아지만 그는 행복하지 않았다. 노아는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뒤늦게 순자는 노아가 백이삭의 무덤을 자주 찾아왔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노아의 비극적 선택을 통해 고국과 타국, 개인적 정체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외국에 살고 있는 교포, 귀화한 외국인, 한국인과 결혼해 살고 있는 외국인과 그들의 자녀들, 외국에 살다 한국에 들어와 살고 있는 연변인, 고려인, 새터민 등 법적으로 국민의 경계가 정해져 있겠지만 시야를 넓혀서 우리나라가 그들 모두에게 힘이 되어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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