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방식 난방 시스템 ‘온돌’ 고려시대도 평민가정서 지속 사용
1933년 ‘구 제일은행 본점’서 국내 최초 냉난방 설비 등장'
위생냉난방·기계기구설치공사업 1982년 ‘설비공사업’으로 통합
1910년 이후 70년 만에 제도적으로 설비공사업 인정

기계설비는 인간에게 쾌적한 삶의 터전을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인체의 골격에 비유한다면 내부 장기, 혈관, 신경과 같은 존재다. 그렇기에 오랜 세월에 걸쳐 기계설비인들의 피땀 어린 연구로 오늘날의 모습으로 발전했다. 기계설비신문 창간에 맞춰 과거 기계설비의 모습과 변천사를 살펴본다.

■ 기계설비 시초

기계설비의 시초는 선사시대 일부 주거형태의 건물에서 발견된 구들(온돌)로 추정된다. 추위로부터 인체를 보호하고 삶을 영위하기 위한 생존전략인 셈이었다.

고고학자들의 연구 조사에 따르면, 1~3세기 무렵 이동생활을 하던 선조들이 몸을 따뜻하게 만들기 위해 불에 달군 돌을 바닥에 깔고 생활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온돌의 시초가 바로 이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연구조사 결과다.

온수공급을 통한 난방은 기원전 100년에 고대 로마에서 시작됐다. 사료에 따르면, 세르기우스 오라타(Sergius Orata)는 하이퍼코스트(hypocaust)를 고안해 마루 밑 난방을 선보였다. 하지만 이 난방은 욕실에 온수를 공급하는 용도에만 사용됐다.

덕수궁.
덕수궁. [서울역사아카이브]

그리고 4세기 삼국시대 고대국가 가운데 고구려 지역에 지어진 주거물에서 구들 형태의 연돌을 자주 발견됐다. 비슷한 무렵 중국 허베이성(河北省)에서는 서실 전체에 온돌이 사용된 기록이 학자 역도원이 저서한 수경원(水經注)에 남아 있다. 온돌 시스템이 기록된 최초의 문헌이다. 하지만 신당서(新唐書)에 따르면, 당시 고구려 민가에서는 일반적으로 온돌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기록됐다. 즉, 온돌은 대체로 삼국시대 고구려에서 활발히 사용된 것으로 추측된다.

무엇보다 중국에서 사용하던 방식은 실내의 한쪽에 벽돌을 쌓아 일부만 덥게 만드는데 그쳤지만, 고구려식 난방은 데우고자 하는 구역의 전체 혹은 일부를 온돌바닥으로 구축하는 차이점이 있다.

고구려 방식의 난방 시스템인 온돌은 삼국을 통일한 이후 한반도에 상당히 넓은 지역에 확산됐다. 고려시대에서도 온돌은 일반 평민가정에서 지속적으로 사용됐다. 다만 조선 초기에는 상류층에게도 보급되고, 17세기 중엽 이후부터 제주지역으로 전파됐다.

1742년 영국에서는 증기보일러에서 발생한 증기를 난방에 이용하고 시도했다. 하지만 현대 연구에 따르면, 이 같은 방식은 증기가 직접 실내에 분출되는 만큼 난방 효과는 미미했을 것으로 조사됐다. 그러다 1745년 배관을 통해 증기를 이용하는 난방 방법을 고안하고, 파이프코일을 부설해 증기난방을 시도한 이후 성공했다.

저축은행 본점.
저축은행 본점. [서울역사아카이브]

복사식 난방방식은 앞선 1716년 스웨덴에서 강관(鋼管)을 이용해 온실(溫室) 난방에 온수를 이용한 것이 시초다. 1831년에는 퍼킨스(Perkins)가 밀폐배관계를 이용한 고온수난방장치를 발명했다.

18세기에는 주철로 제작한 연관을 실내에 설치해 난방하는 방식이 채택됐다. 이후 19세기 들어 연기난방, 온수난방이 서양에 본격 보급됐다.

고온수난방에는 중력순환식과 가압방식으로 구분된다. 중력순환식은 최고 180℃ 가량의 공급수온이며, 반환시 온도차가 20~30℃였다.

가압방식은 크게 기계순환식이 처음 보급된 이후 1925년 이후 열기가업, 1940년 이후 질소가압이 이용됐다.

■ 한국의 기계설비

정부신청사.
정부신청사. [서울역사아카이브]

 

한국 기계설비의 발전은 1910년 이후 서양 문물이 본격적으로 국내에 유입되면서 발달하기 시작했다.

현대의 기계설비산업이라 칭할 수 있는 부분은 일제강점기(1911년~1945년) 일본인의 주도 아래 도입됐다. 대표적 건축물은 조선호텔과 서울시청사다. 특히 1933년 착공한 저축은행 본점(옛 제일은행 본점)은 급기와 환기덕트를 설치하고, 공기조화설비에 의해 냉·난방이 이뤄진 국내 최초의 건물이다.

해방 직후부터 1960년까지는 주한미군에 의한 설비 개·보수작업이 이뤄졌다. 또한 전쟁복구사업, 경제개발5개년계획 수립 등으로 신축 건축물이 늘면서 기계설비산업도 발전했다.

무엇보다 1961년 한국인의 손으로 지은 첫 번째 정부청사인 ‘현 미국대사관과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기계설비산업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건물은 미국의 금융 원조와 필리핀 기술로 건설됐다. 설계와 시공은 각각 미국의 태평양건축엔지니어(PA&E)와 빈넬(Vinnel)사가 맡은 것으로 기록됐다. 특히 해당 공사에 참여해 시공 경험을 쌓은 기술자들이 향후 국내 냉난방설비공사에 적극 참여하는 발판이 됐다.

기계설비건설업은 단종건설업 면허제도가 도입 이후 본격적인 현대의 모습을 갖춰가기 시작했다. 설비건설업은 1976년 11월 설비계열로는 △위생냉난방공사업 161개사 △기계기구설치공사업 39개사가 최초로 면허를 취득했다. 또한 200개 업체가 건설업법에 의해 단종회원으로 가입하고, 이때 설비를 포함한 단종회원 총수는 658개 업체 921개 면허에 이르렀다.

마포아파트.
마포아파트. [국가기록원]

이후 1981년 12월 단종건설업을 전문건설업으로 명칭 변경하는 내용으로 관련 법령이 개정됐으며, 1982년 위생냉난방공사업과 기계기구설치공사업이 ‘설비공사업’으로 통합됐다. 1910년 이후 설비공사가 시작된 지 70년 만에 제도적으로 설비공사업이 인정된 것이다.

기계설비건설는 1980년에는 국가경제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33만 578㎡(10만평)가 넘는 대형 건축물이 들어섬에 따라 기계설비기술도 한 단계 도약했다.

실제로 1989년 설비공사업종 업체가 1천361개였으나, 1999년에는 가스(1종)을 포함해 4천958개 업체로 10년 만에 3.5배 넘게 늘어났다. 이는 1990년 이후 초고층 아파트, 지역난방시스템이 본격적으로 적용되면서 설비분야의 활용도가 확대된 영향으로 풀이된다. 특히 1997년에는 건설산업기본법 개정으로 설비공사업 명칭이 기계설비공사업으로 변경, 기계설비업역이 늘어난 점도 성장에 일조했다.

삼일빌딩.
삼일빌딩.

최근에는 정보통신기술(ICT), 환경기술(ET) 등과의 결합도 시도되고 있다. 제로에너지빌딩(ZEB) 등 합리적으로 에너지를 이용하는 방법과 더불어 쾌적한 삶의 공간을 누리고자 하는 시대적 눈높이에 따라 향후 산업의 비중과 범위가 더욱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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