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1973년 ‘개척기 시대’

1961년 5월16일 군사정부에 의해 종합경제개발계획이 수립되고,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착수돼 경제가 활성화되면서 서울 시내에 많은 건물들이 건립됐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5.16 직후 주한 미군들이 일본에서 휴가를 즐기며 사용하는 미화를 우리나라에서 소비하도록 미군 유치계획 일환으로 광나루 산마루에 각종 위락시설을 갖춘 리조트 호텔을 설계했다.

사업명은 한국전쟁 시 전사한 워커장군을 기념해 워커힐이라 명명했다. 워커힐 사업은 겨울공사의 난관 등 우여곡절 끝에 1962년에 준공됐다.

워커힐은 단일 건물이 아니고 중앙에 이동 무대를 갖춘 연예장, 카지노, 바, 식당 등이 있는 주 건물과 주변의 산등성이에 장교호텔 1동, 사병호텔 2동과 소규모의 모텔과 옥외수영장, 사격장, 레크레이션 센터를 상징하는 힐탑바가 W자형으로 배치됐다.

설비설계는 김효경의 주도하에 위용호, 배승환 등 현대설비연구소 구성원들이 담당했다. 

워커힐 사업의 설비설계를 통해 그때까지도 부대 설비로 천대받던 건축설비기술이 건축가들에게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됐다.

1964년 이 사업에 참여했던 위용호는 현대설비에서 독립해 냉난방설비 실무자를 양성하기 위해 동대문구 전농동에 국제 냉난방기계기술학원을 개설하고 많은 기술자를 양성했다.

한편 대학 졸업 후 미국에서 국제냉난방과정을 이수하고 귀국한 후 천우사에서 냉난방기기의 무역업무를 담당하던 유동열은 공조설비 설계업무에도 참여했다.

1961년 조흥은행 남대문 지점, 한일은행 을지로지점, 동대문지점, 상업은행 명동지점의 설비설계를 담당하다가 1962년 삼신설비연구소를 설립하고 설비설계 전문업으로 독립해 설비업계의 기반을 굳건히 했다.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하고 졸업 후 설비설계를 시작한 박용한은 1966년 세일건축설비연구소(현 성아기술사)를 설립했으며, 최상홍은 서광산업 기계부에 근무했다.

 

저작권자 © 기계설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