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사자재값 ‘고공행진’, 무력한 제도장치 보완 시급

ESC 적용 공공부문 처럼 민간부문도 제도 마련해야
‘표준하도급 대금 연동 계약서’ 의무화가 ‘첫 단추’

최근 몇 년 동안 원자재 가격이 급등하면서 국내 산업계에서 ‘납품단가 연동제’가 핫 키워드로 떠올랐다. 건설업계를 비롯한 전 산업계가 급격한 원자재 가격 상승분을 계약대금 조정에 반영해달라고 목소리를 높이면서다. 이에 본지는 원자재 가격 상승에 따른 대금조정과 관련된 제도적 문제점을 살펴보고, 최근 정부와 정치권을 중심으로 논의되고 있는 납품단가 연동제의 추진상황에 대해 점검해보는 시간을 갖는다. /편집자 주

지난 4월 11일 기계설비건설협호 등 18개 중소기업 단체가 납품단가 연동제 도입을 요구하며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모습.

◇ 물가변동 시 대금조정제도는

납품단가 연동제는 계약기간 중 원부자재 가격이 변동될 경우, 이를 납품단가에 반영하는 제도로, 지난 2008년 도입이 검토됐지만 시장경제원리를 훼손하고 중소기업의 혁신의지를 약화시키는 등의 부작용을 우려해 도입되지 않았다.

다만 공공부문의 경우에는 에스컬레이션 제도(ESC)를 통해 물가변동분을 대금조정해 주도록 제도화했고, 민간부문에서도 하도급법과 표준하도급계약서를 통해 일정 비율 이상 자재가격이 변동될 경우, 납품단가 조정을 협의할 수 있도록 했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국가계약법 시행령에서는 장기계속공사 및 장기물품제조에 대한 제1차 계약 체결 후 90일 이상 경과한 경우 △기획재정부령이 정하는 바에 의해 산출된 품목조정률이 3% 이상 증감된 때 △기획재정부령이 정하는 바에 의해 산출된 지수조정률이 3% 이상 증감된 때에는 계약대금 조정을 해주도록 했다. 특히 공사계약의 경우, 특정규격의 자재별(순공사원가의 1% 이상인 자재) 가격변동으로 인해 가격증감률이 15% 이상인 때에는 해당 자재에 한해 계약금액을 조정하도록 하고 있다. 일명 에스컬레이션(ESC) 제도와 단품슬라이딩 제도다.

국가계약법 시행령은 지방계약법에도 동일하게 규정돼있어 공공공사의 경우에는 원자재 가격변동분에 대해 계약금액 조정이 이뤄지고 있다. 특히 물가변동에 따라 계약대금을 조정받은 원사업자는 동일한 비율만큼 하도급 대금을 조정하도록 하고 있다.

물론 이 제도를 적용하는 공공공사의 경우에도 물가변동 시점과 조사시점의 차이로 인해 급격한 원자재가격 상승세가 이어지고 있는 요즘에는 가격상승분만큼 충분히 보전받기는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문제는 민간공사다.

민간부문의 경우에는 공사대금 조정과 관련해 규정해놓고 있는 제도적 장치는 건산법 상 민간건설공사 표준도급계약서와 하도급법 상 표준하도급계약서다.

건산법에 따른 민간건설공사 표준도급계약서에도 국가계약법을 준용한 물가변동으로 인한 계약금액 조정 조항이 포함돼 있다.

하지만 표준도급계약서의 사용은 의무가 아닌 권장사항인데다, 현실에서는 계약 시 해당 조항을 삭제하거나 특약을 통해 대금조정을 배제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럴 경우를 대비해 건산법에서는 계약내용이 당사자 일방에게 현저하게 불공정한 경우, 해당내용을 무효화하는 조항이 마련돼 있다. 하지만 이마저도 ‘현저하게’라는 애매한 규정으로 인해 현실적으로 적용이 어렵다는 것이 업계의 시각이다.

민간건설공사 대금조정과 관련된 또 다른 제도적 장치인 하도급법에 따른 표준하도급계약서에는 △목적물 등의 공급원가가 변동되는 경우 △수급사업자의 책임으로 돌릴 수 없는 사유로 목적물 등의 납품 등 시기가 지연돼 관리비 등 공급원가 외의 비용이 변동되는 경우에는 하도급 대금의 조정을 신청할 수 있도록 돼 있다.

이 규정에서는 또 원사업자로 하여금 하도급업체의 대금 조정신청이 있는 날로부터 10일 이내에 대금조정을 위한 협의를 개시해야 하며, 정당한 사유없이 협의를 거부하거나 게을리 하지 않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이 조항 역시 하도급 대금조정을 위한 협의 시작점을 10일 이내로 규정했을 뿐, 반드시 대금조정을 해줘야 한다는 규정은 없다. 특히 원사업자가 10일 이내에 협의에 응하지 않거나 30일 이내에 대금조정에 합의를 하지 못한 경우 등의 사유로 하도급분쟁조정협의회에 조정신청을 할 수 있는 것이 고작이다.

◇ 민간부문에서는 ‘유명무실’

이처럼 급격한 물가변동이나 원자재가격 상승분에 대해 대금조정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는 마련돼 있지만, 자율적 계약을 중시하는 민간부문에서는 사실상 유명무실한 제도라는 것이 업계의 인식이다.

민간공사에 표준(하)도급계약서를 사용했다고 하더라도 원가상승에 따른 변동분을 대금에 반영해 계약금액을 조정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실제 현장에서는 표준도급계약서나 표준하도급계약서를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특약을 통해 대금조정 관련 조항을 무력화시키는 경우가 다반사다. 특히 별도의 특약이 없다고 하더라도 원가상승에 따른 계약금액 조정이 강제의무사항이 아닌 임의권고사항이기 때문에 사적이익을 중시하는 민간공사에서 이를 적용하는 사례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심지어 국토교통부가 민간공사 계약서에 물가변동으로 인한 계약금액 조정을 배제하는 ‘물가변동 배제특약’이 무효가 될 수 있다는 유권해석을 내렸음에도, 이를 법원에서 인용할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 분위기다.

그동안 법원은 사인간 거래에 있어 가장 우선시 되는 것이 자율적 계약의사이기 때문에 계약서에 포함된 (부당)특약 또한 유효한 것으로 판단해 왔기 때문이다.

하도급 대금 조정과 관련해서도 지난 4월 말 공정거래조정원의 발표에 따르면, 원자재 가격상승과 수급불안으로 인해 발생한 하도급대금 관련분쟁이 크게 늘어난 것으로 조사됐다. 올 1분기 공정거래조정원에 접수된 원자재 가격급등에 따른 하도급 대금분쟁 사건은 7건으로, 전년대비 5건이 늘어났다. 수치적으로는 적어보이지만, 하도급업체가 거래단절 등 모든 불이익을 감수하며 마지막 선택지로 찾아가는 곳이 공정거래조정원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특히 공정거래조정원에 접수된 대부분의 사례가 하도급업체가 원사업자에게 공급원가 상승에 따른 하도급 대금 조정을 신청했지만, 원사업자가 정당한 사유없이 협의 자체를 거부하거나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경우라는 것이었다. 결국 표준하도급계약서 적용에도 불구하고, 원사업자가 원가상승에 따른 대금조정 협의에 임하지 않거나, 소극적으로 임할 경우에는 어떤 대처도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하도급업체 입장에서는 ‘유명무실’한 제도로 인식할 수 밖에 없다.

이 때문에 중소기업계와 일부 건설단체는 하도급법과 표준하도급계약서에 하도급업체에게 대금조정신청권 뿐만 아니라 대금청구권을 부여하도록 규정해야 한다고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또 국가계약법 상 물가변동에 따른 계약금액 조정을 위한 기준이 되는 한국은행의 지수조정률은 건설산업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만큼, 국토부가 별도의 건설부문 물가지수를 발표해 이를 적용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있다.

이외에 건산법 상 특약 무효 조항의 경우에도 ‘현저하게’라는 문구 대신 하위법령으로 구체적인 기준을 명시해야 법의 실효성을 담보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특히 특약 무효가 성립될 경우에는 계약해지권까지 부여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 납품단가 연동제 도입될까

대한기계설비건설협회를 비롯한 건설단체들은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인한 중소기업계의 위기에 대해 대통령인수위, 정치권 등에 대응책을 건의하고 제도화를 요청했다.

여당인 국민의힘은 원자재가격 상승에 따른 대금조정을 위한 근본적인 해결방안으로 ‘납품단가 연동제’ 카드를 꺼내들었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시절부터 ‘납품단가 연동제’ 도입을 실천과제로 내건 정부와 여당은 납품단가 연동제 도입을 골자로 한 하도급법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혀왔다.

그 일환으로 지난 9일 여당인 국민의힘 강민국 의원은 표준하도급대금 연동계약서 제정과 이를 의무적으로 사용하도록 명시한 ‘하도급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이 개정안에서는 원자재 가격의 변동에 따라 하도급 대금의 연동이 필요한 경우에는 원자재 품목, 가격기준, 연동방법 등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사항이 포함된 표준계약서(표준하도급대금 연동계약서)를 제정 또는 개정하고, 하도급법 적용대상이 되는 사업자는 이 계약서를 의무적으로 사용하도록 하고 있다.

그동안 새정부가 밝혀왔던 정책기조가 반영된 결과다. 하지만 이 법안이 국회를 통과해 시행될 수 있을지 여부는 아직 미지수다. 시장경제원리를 훼손하고 중소기업의 혁신의지를 막는다는 이유를 들어 지난 2008년에도 무산된 바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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